선교장과 둘레길 그리고 사계절
족제비가 점지해준 명당 강릉 선교장은 수백 년 된 금강송과 오죽이 숲을 이뤄 대저택을 아늑하게 품고 있다. 아름드리 노송은 은은한 솔향과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그 사이로 청룡길과 백호길이라는 선교장 둘레길이 생겼다. 청룡길에서는 백호길이, 백호길에서는 청룡길이 건너다 보이고 그 중간에 선교장의 아름다운 사계절이 자리하고 있다, 철 따라 선교장 둘레길을 거닐어야 하는 이유다.
선교장.
안채, 사랑채,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외별당, 행랑채, 사당과 정자까지 모두 갖춘 99칸 고택에 연못까지 완비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택'이다. 무려 300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풍랑속에서도 대부분의 건물이 건재한 이유는 만석꾼 고택 주인들의 '후덕한 인심' 때문이라고 한다.
청룡길과 선교장
청룡길은 선교장 열화당 뒤편 초가 녹야원과 이어지는 산책로다. 녹야원 바람막이가 되는 오죽림과 선교장 본체 뒷담을 따라 오래된 금강송 숲 사이로 형성된 청룡길은 그윽한 솔향이 일품이다. 오죽헌과 거리가 멀지 않은 위치, 그래서 그런지 오죽은 백호길에도 군락을 이루고 있다. 강릉이란 지역이 오죽이 서식하기에 좋은 환경인지도 모른다.
녹야원 앞에는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수 없는 배롱나무가 여름이 되면 선홍색 목백일홍을 터뜨린다. 열화당 앞마당 능소화와 더불어 한여름의 선교장을 이끄는 주인공들이다. 정확한 수령은 알 수 없지만 노거수에서 피어오르는 목백일홍은 활래정 배롱나무와 더불어 선교장의 대표적인 수목이다.
녹야원 옆에는 또다른 볼거리로 570년 된 보호수 주엽나무가 굳센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오랜 세월 병마와 싸운 흔적인지 나무 윗부분이 잘려나간 모습이다. 저 주엽나무의 그늘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위를 식히고 얼마나 많은 동식물이 혜택을 받았을까 생각해보면 마음 한편이 아린다.
발걸음을 청룡길로 옮겨보자. 선교장 둘레길에 자라는 소나무는 그중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금강송이다. 선교장 담벼락을 따라 심어진 오죽과 더불어 자리하고 있는 보호수인 금강송은 수령이 520년이 넘는다. 그 주위에 송림을 이루고 있는 소나무들의 수령 역시 수백 년은 되어 보여 보는 이들의 시선을 압도한다.
금강송을 명품송으로 뽑는 이유는 일본의 국보 1호로 인정받고 있는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이 금강송으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 국보 제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뿌리가 같은 것으로 금강송의 가치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귀한 수종을 그것도 수백년이 흐른 금강송 수림을 산책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다.
이제 눈길을 선교장으로 돌려보자. 가을을 지나 겨울문턱에서 바라본 선교장은 늦단풍이 있는 가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대저택의 단아함과 규모 그리고 단풍나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수종으로 이루어진 늦가을 자연 속의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송림을 따라 선교장 담장이 이어지고 선교장 너머 백호길을 배경으로 선교장 풍경을 감상하다 보면 송림과 더불어 청룡길 종검에 다다른다. 길은 내리막으로 접어들면서 활래정이 모습을 보인다.
활래정.
열화당과 더불어 선교장의 백미와 같은 정자다.
여름이 되면 연꽃과 상사화, 배롱나무가 꽃을 피워 활래정은 더욱 돋보이게 한다. 연잎과 연꽃 위에 둥실 떠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정자로 다실로도 유명하다. 수많은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이 차와 더불어 풍류를 누렸던 곳으로 정자 곳곳에 유명한 서예가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활래정이란 주자의 관서유감에서 따 온 것으로 '끊임없이 내려오는 물'이란 의미가 있다. 실제 활래정 연못에는 약 4km 떨어진 곳에서 끊임없이 맑은 물이 흘러든다. 이러한 연못에 돌기둥을 심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겨울에는 하얀 눈 위에, 연꽃이 자라기 전에는 물 위에 다리를 내딛고 서있는 활래정을 생각해보라. 연못 한가운데 작은 섬을 만들고 기품 어린 소나무까지 심었다. 배롱나무와 연꽃, 여기에 소나무가 있는 섬을 조연으로 둔 낭만적인 정자인 것이다.
백호길과 선교장
활래정을 돌아본 후 발걸음을 선교장 민속박물관 방향으로 옮겨보자. 민속박물관은 다양한 수목 사이로 언뜻 보이는 선교장은 누구나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좌측으로 발길을 옮기면 선교장 매표소와 민속박물관과 더불어 백호길이 시작된다.
백호길은 약간의 경사와 더불어 시작된다. 민속박물관 뒤로 언덕을 따라 밤나무, 감나무, 산수유 등 과실수 사이로 할래정을 비롯한 선교장 모습을 볼 수 있다. 밤나무와 감나무는 언제나 시골, 고향이란 느낌으로 우리에 다가와 친근감이 느껴진다. 마치 고향에 온 기분이랄까? 청룡길이 송림을 주제로 한 둘레길이라면 백호길은 밭이나 과수원 같은 느낌을 받는다.
선교장에 봄이 오면 노란 산수유꽃을 시작으로 매화, 진달래, 철쭉, 벚꽃 등이 계절의 변화를 알린다. 감꽃과 밤꽃이 뒤를 이어 피고 지면서 순리를 따르면서 300년이란 긴 세월을 반복해온 것이다.
백호길에는 밭과 과수원(?)이 있다. 아마 선교장 식구들의 먹거리를 가꾸는 텃밭도 있겠지만 자세히 살펴볼 기회는 얻지 못했다. 봄이나 여름에 가면 무엇을 심고 가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백호길 중간쯤에는 선교장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장소도 제공된다. 일명 포토존이라고나 할까. 아래 사진은 그 위치에서 찍은 것이다.
백호길에서 바라본 선교장은 청룡길에서 바라본 모습과는 또 다르다. 선교장 본체가 청룡길을 뒤로하는 반면 백호길은 본체를 마주한 위치로 부수 건물인 숙소 홍예헌 1관과 2관, 초가 1관과 2관, 전통문화체험관, 민속공방, 카페, 박물관 등이 있다.
백호길 송림 역시 오죽과 더불어 작은 숲을 이룬다. 청룡길의 금강송 수림에 비해 다소 왜소한 모습이지만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동산임에 틀림없다. 민속문화체험관 뒤에 위치한 백호길 송림에서 바라본 선교장 본체의 모습이다. 선교장 둘레길을 걷게 되면 이처럼 다양한 풍경의 선교장을 즐길 수 있어 좋다.
백호길 송림을 벗어나면 은행나무가 가을의 끝을 부여잡고 시간의 흐름을 아쉬워한다. 길을 따라 내려서면 백호길과 청룡길 갈림길이 나타나고 선교장 둘레길 산책을 마치게 된다.
고택이라는 사실을 벗어나 선교장과 함께 어우르고 있는 노거수를 비롯, 다양한 수목들을 살펴보았다. 전국 어디를 가나 이름 있는 곳에는 이처럼 자연이 조연으로 아주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아낌없이 주는 자연에 감사하며 되돌아 설 때 초가지붕 이엉 잇기가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킨다.